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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운을 가른 가수들의 립싱크 사연들

팝 음악 최고의 디바 머라이어 캐리(Mariah Carey)의 연말연시는 혹독하기만 했다. 가는 해를 지저분하게 마무리하는 동시에 새해에 부끄럽게 입장했다. 12월 31일 미국 뉴욕 타임스 스퀘어에서 열린 새해맞이 공연 <딕 클라크스 뉴 이어스 로킨 이브>(Dick Clark's New Year's Rockin' Eve) 중 그녀는 립싱크 사실이 들통나는 수모를 겪었다. 수백만 명이 실시간으로 지켜본 개망신의 순간이었다.​이날 머라이어 캐리는 'Auld Lang Syne'과 자신의 히트곡 'Emotions', 'We Belong Together'를 불렀다. 주변에 모인 사람들은 즐거운 표정을 지었지만 머라이어 캐리는 초반부터 낯빛이 좋지 못했다. 'Auld Lang Syne'을 부를 때 이미 뭔가 만족스럽지 않다는 심기가 얼굴에 드러났고 'Emotions'의 반주가 흐르자 착용하고 있던 모니터 이어폰을 빼 버렸다. 반주가 나오는 중에도 노래를 부르지 않다가 함께 부르자는 투로 관객에게 마이크를 넘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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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성으로 일관한 공연은 'We Belong Together'를 부를 때 엉망의 꼭짓점을 찍었다. 노래와 입은 맞지 않은 지 오래, 마이크를 입가에서 멀찍이 떨어뜨린 상태에서도 그녀의 목소리는 조금의 변동 없이 바르게 흘러 나왔다. 립싱크 공연임을 시원하게 자백하는 순간이었다. 그녀는 노래가 마무리될 즈음에 "상황이 나아지지 않는다."는 말을 남기고 도망치듯 뒤돌아 나갔다.​이 일 이후 머라이어 캐리가 행한 대응은 실망스러움을 더 키운다. 며칠 뒤 그녀는 백업 댄서이자 공연 감독인 앤서니 버렐(Anthony Burrell)을 해고했다. 공연을 망친 것에 대해 모니터 이어폰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해명하면서도 궁극에는 사고의 책임을 스태프에게 돌린 것이다. 2016년 한 해 동안 투어 공연을 함께한 파트너 앤서니 버렐은 그렇게 토사구팽의 주인공이 됐다. 멀쩡한 사람 밥줄까지 잘라 버린 립싱크. 립싱크가 이렇게 무섭다.​


머라이어 캐리 이전에도 여러 가수가 립싱크 때문에 구설에 올랐다. 마이클 잭슨(Michael Jackson), 마돈나(Madonna), 재닛 잭슨(Janet Jackson) 같은 톱스타들도 립싱크를 빈번하게 해서 비난을 샀다. 하지만 이들은 주로 화려한 춤을 동반하는 가수이기에 근사한 퍼포먼스를 보여 주기 위해서는 립싱크가 어느 정도 불가피한 선택일 수밖에 없다. 헉헉거리는 숨소리를 듣는 것보다 안정된 쇼를 감상하는 편이 낫다면서 이들의 립싱크를 옹호하는 팬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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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에서 춤을 춘다고 해서 반드시 립싱크가 용인되는 것은 아니다. 1980년대 후반 'Girl You Know It's True', 'Girl I'm Gonna Miss You' 등으로 큰 인기를 얻은 독일의 댄스 듀오 밀리 바닐리(Milli Vanilli)는 엄청난 욕을 먹었다. 실제로 이들의 노래를 부른 가수의 폭로로 퍼포먼스를 위해 립싱크를 한 것이 아니라 애초에 붕어 가수였음이 까발려졌기 때문이다. 밀리 바닐리는 1990년 그래미 어워드에서 '최우수 신인'을 수상했지만 립싱크 사실이 드러나면서 상을 박탈당한다.​수상이 취소된 뒤에는 수십 건의 소송도 찾아왔다. 더불어 '희대의 사기꾼'이라는 오명도 떠안아야 했다. 두 멤버 롭 필라투스(Rob Pilatus)와 팹 모르반(Fab Morvan)은 롭 앤드 팹(Rob & Fab)이라는 이름으로 1993년 진짜 본인들의 앨범을 출시했지만 이미 음악팬들은 등을 돌린 상태였기에 회생에 실패하고 만다.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진 처참한 상황을 견딜 수 없었던 롭 필라투스는 술과 마약에 의지하다가 1998년 약물 과다 복용으로 사망하게 된다. 립싱크가 이렇게나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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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 소녀들을 광분케 한 아이돌 그룹 뉴 키즈 온 더 블록(New Kids on the Block)도 립싱크 논란에 휩싸였다. 그룹이 공연할 때 그룹의 프로듀서인 모리스 스타(Maurice Starr)가 미리 녹음한 보컬에 맞춰 립싱크를 한다면서 이들 앨범에 참여했던 키보드 연주자가 1992년 그룹을 고소했다. 뉴 키즈 온 더 블록은 결백을 주장하며 맞고소했다. 그러자 의혹을 제기한 키보드 연주자가 고소를 취하하면서 사건은 곧 일단락됐다.​뉴 키즈 온 더 블록은 모리스 스타와 결별하고 1994년에 낸 [Face the Music]의 인트로에서 "립싱크? 넌 우리가 그것보다 훨씬 낫다는 걸 알잖아."라며 립싱크 논란은 헛소문이라고 다시 한 번 일축했다. 그룹에서 병풍 같은 존재인 조너선 나이트(Jonathan Knight)를 제외하고 멤버들의 목소리가 다 다른데 한 사람이 이들의 노래를 녹음했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얘기였다. 해프닝으로 끝나긴 했어도 이 일로 인해 그룹의 인기는 빠르게 하락했다.


우리나라에서는 혼성 그룹 마로니에가 립싱크로 문제가 된 적이 있다. 1994년 어마어마한 인기를 끈 3집의 타이틀곡 '칵테일 사랑'을 부른 이는 원년 멤버 신윤미였다. 그녀는 유학을 떠나면서 그룹을 탈퇴했지만 마로니에는 새로운 멤버를 영입한 후에도 신윤미가 녹음한 버전을 그대로 사용했다. 이에 신윤미가 음반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고 이듬해 법원은 신윤미의 손을 들어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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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계 곳곳에 얼룩을 남긴 립싱크는 때로는 대중에게 신선한 재미를 주기도 한다. MBC 코미디 프로그램 <오늘은 좋은 날>의 코너로, 1996년부터 97년까지 전파를 탄 '허리케인 블루'가 그 주인공이다. 김진수와 이윤석은 이 코너를 통해 유명 팝송을 립싱크로 따라 부르는 독특한 방식을 시도했다.​둘은 과장된 제스처를 통해 우스꽝스러움을 확실히 나타냈다. 더불어 원곡 가수의 특징과 곡 분위기를 잘 살림으로써 음악 애호가들의 주목도 이끌어 냈다. 스틸하트(Steelheart)의 'She's Gone', 퀸(Queen)의 'Bohemian Rhapsody', 장 프랑소아 모리스(Jean Francois Maurice)의 'Monaco' 같은 노래들은 그들만의 해석이 깃든 패러디로 더 많은 사람에게 쉽게 다가갔다. '허리케인 블루'는 익살을 앞세운 그 시절 제일의 팝송 전도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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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중국, 인도네시아 등 여러 나라가 판권을 구입한 미국의 음악 서바이벌 프로그램 <립싱크 배틀>(Lip Sync Battle)은 허리케인 블루의 영향을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하다. 2015년 4월 첫 방송된 <립싱크 배틀>은 스타들이 출연해 제목 그대로 립싱크 대결을 벌이는 쇼다. 한 주에 두 명의 유명인이 출연해 각각 두 곡을 선보인 후 승자를 가린다.​참가하는 스타들의 열의는 대단하다. 대체로 남성 참가자는 남자 가수, 여성 참가자는 여자 가수의 노래를 선택하는 편이지만 여장을 서슴지 않는 이들도 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참가자는 복장, 소품, 안무를 세심하게 모방해 진지한 공연을 펼친다. 이디나 멘젤(Idina Menzel)의 'Let It Go', 비욘세(Beyonce)의 'Run the World (Girls)'를 부른 채닝 테이텀(Channing Tatum)은 어울리지 않는 여장 덕에 충격적으로 웃겼다. 조지프 고든 레빗(Joseph Gordon-Levitt)이 정성스럽게 재닛 잭슨을 복원한 'Rhythm Nation' 무대는 정상적으로 일품이었다.


립싱크를 하지 않아서 폭소를 유발하는 사례도 존재한다. 본명이 백지현인 오리(Ori)는 2009년 1월 KBS <뮤직뱅크>에서 '눈이 내려와'로 데뷔 무대를 가졌다. 발랄한 선율의 전주가 흐를 때만 해도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노래를 부른 지 얼마 되지 않아 음 이탈의 반복과 불안한 음정으로 보는 이를 웃게 만들었다. 안쓰러운 마음이 드는 것이 우선이지만 가수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만큼 엉성한 실력 때문에 웃음이 날 수밖에 없었다.​방송 당시 오리의 나이는 열일곱 살이었다. 리허설 때는 괜찮았다고 해도 어린 나이에 큰 무대에 서는 일은 중압감을 느끼게 했을 듯하다. 게다가 가수로서의 기본 자질이 부족한 상태에서 음반을 취입했으니 라이브보다는 립싱크가 저 상황에 맞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오리는 이튿날 포털사이트 실시간 검색어에 오를 정도로 큰 관심을 받았지만 그 후로 방송에서 모습을 볼 수 없었다. 결국 오리는 데뷔 무대와 고별 무대를 동시에 치른 몇 안 되는 희귀 가수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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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브 공연은 세심한 준비가 필요하며 인력과 시간, 비용이 많이 소요된다. 장비가 잘 갖춰져야 함은 기본이고 연주자들 섭외에다, 이들과 가수가 호흡을 여러 번 맞춰 봐야 원활한 라이브를 진행할 수 있다. 일련의 사정 때문에 차분한 노래를 부르더라도 립싱크를 하는 경우는 많다. 공연 시스템이 발달하고 넉넉한 자본을 보유한 미국의 음악 프로그램에서도 립싱크는 허다했다.​관건은 마음가짐이다. 공연장의 여건이 받쳐 주지 않아서, 혹은 본인의 컨디션이 좋지 않아서 립싱크를 해야 한다면 그 상황에서 최대한 정성스러운 공연을 선보이는 것이 뮤지션의 도리다. 머라이어 캐리의 새해 전야 퍼포먼스가 실망스러웠던 진짜 이유는 립싱크를 했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다. 무대 사정을 핑계로 내내 보인 불성실한 모습이 실망감을 안긴 본질적인 이유다. 립싱크를 만만하게 봐서는 곤란하다.​2017-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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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을 올리면서 <립 싱크 배틀>을 검색해 봤더니 아직도 하고 있더라. 출연자들이 정성껏 준비를 해서 보는 재미가 쏠쏠한 프로그램이다.